ssebob의 세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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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의 섬진강 4월, 상처


초록배움터에서 가진 진상 4월 출사, 그리고 나의 첫 진상 출사..

남원에서 보는 섬진강으로 출발..

강의 규모에 비해 다릿발이 부실해 보인다.

단체사진 한 컷.강 바닥 사체를 두고 수달이다 아니다를 두고 논란을 벌인다. 분명한 건.. 자연사 하지는 않았을 것라는 것..

남원의 마을 모습 처럼 강도 소박하다. 아니지.. 산과 강이 소박해서 마을이 소박한 거겠지..



낚시를 던지는 태공..

한창인 벚꽃을 향해 렌즈를 들이대고 있는 강영희 회원.. 이젠 페이스북 친구입니다.

진달래가 나도 좀 찍고 가랍니다.. 잎과 함께 피었군요..


저기 정자가 최종 목적지. 멀리 사각형의 금호타이어 공장이 보입니다. 정자에서 내려다 보는 강은 파헤쳐지고..

이 모습도 얼마나 더 볼 수 있을지 장담하기 힘듭니다.


정자에서 내려다 본 풍경..

물 얻어 마시러 들어간 마을에서 본 장독대가 무척 외로워 보입니다. 이젠 누굴 위해 된장 고추장을 삭힐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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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4. 21.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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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에 대한 진지한 물음 <아쉬람>


 <아쉬람>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영화다.
여성인권의 시각으로 본다면 더할 수 없는 성평등 영화이고, 종교를 중심에 둔다면 그 어떤 종교 영화보다 믿음에 대한 참 의미를 진지하게 묻는 영화이다. 또한 사회 부조리와 지식인의 자기 모순을 정면으로 고발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 영화는 이토록 무거운 주제에도 불구하고, 짜임새가 치밀하고, 개연성이 높아서 작품의 완성도 또한 찬사를 받을만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비록 인도영화를 많이 보진 않았지만, <아쉬람>은 내가 그 전까지 보아온 인도영화에 대한 고정관념을 일순간에 깨어버린 영화이기도 하다. 그 고정관념이란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춤과 노래로 관람자의 눈과 귀를 무리하게 충족시키려는 특유의 공연적(?) 요소, 또는 헐리우드와 경쟁한다고는 하지만 실상 줄거리나 포맷은 헐리우드 방식을 그대로 모방하거나 부분적으로 이식한 듯한 영화(발리우드)를 말한다.

<아쉬람>은 이런 류의 인도 영화와는 달리 시종일관 진지하고 또 진지하다. 그러면서도 줄거리의 재미와 긴장을 마지막 장면까지 잃지않는다.
하도 궁금해서 검색을 해봤더니 감독 '디파메타'는 역시 예상대로 여성이었다. 더구나 뉴델리대학에서 철학으로 석사와 학사 학위를 받은 인물이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신앙과 양심 사이에서 갈등하며 주고 받는 수많은 질문들은 분명 감독 자신이 종교와 철학을 공부하며 갖게된 의문일 것이다.

영화는 쭈이아라는 여덟살난 주인공이 결혼하자마자 과부가 되어 폐쇄적으로 운영되는 수도원 <아쉬람>에 들어가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거기서 만나는 또다른 주인공 깔라니와 나라얀의 사랑 이야기가 전면으로 전개가 된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멸시와 천대속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을 다큐적인 시각으로 현실감 있게 그린다. 영화를 관통하는 커다란 주제도 인도 여성들의 인권, 그중에서도 가장 낮은 곳에서 억압과 차별을 온몸으로 견뎌야 하는(지금까지) 과부들의 인권문제가 중심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한편으로 인도 카스트의 가장 상위층인 브라만 계급의 치부를 고발한다. 앞에서는 가장 부정하고 천하게 여기는 과부들을 은밀히 뒷문으로 불러들여 매매춘을 하고는 오히려 그것이 여성들에게 영광스런 일이라고 말하는 브라만. 그들을 보면 성추행이나 성매매를 하고도 그것이 성공한 남자들의 자연스런 권리인냥 말하는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이나 검사들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또한 그들의 자녀들은 영국 유학을 하면서 배운 바이런의 저항시를 읊고, 위스키를 마시고 자유를 그리워 하면서도 그들이 가진 기득권은 절대 포기하려 들지 않는다.
영화 중반부에 깔라니의 언니 사쿤딸리는 과부 재가를 허용하는 법이 통과됐다는 사실을 알고 놀란다. "왜 우리는 그 사실을 모르는거냐"고 묻는 그녀에게 종교지도자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지배자들)은 자기에게 이득이 안되는 법은 무시하기 때문이다"라고. 놀랍도록 지금의 대한민국 사회와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가.

하지만 이것만으로 이 영화를 다 설명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여성인권 문제와 함께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참된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반복해서 물음을 던진다. 때로는 깔라니와 나라얀의 대화를 통해서 또는 깔라니의 친언니 사쿤딸라와 종교지도자와의 대화를 통해서, 그리고 간디의 음성과 가르침을 통해서.
"신상(神像)은 기도를 들어줄거라 생각하면서, 왜 구름은 못들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거죠" -나라얀이 깔라니에게.
"깨달음(해탈)이 육체의 욕망을 벗어난 곳에 있는 것이라면 나는 아직 깨닫지 못했습니다" -사쿤딸라와 종교지도자
"신앙과 양심이 서로 부딪힐땐 무엇을 선택해야 합니까?"
"경전을 마음대로 해석하는 브라만은 절대 예우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 나라얀이 그의 아버지에게  

그리고 믿음의 자세에 대해 정수리를 찌르는 한마디는 뭐니뭐니 해도 마지막 장면에서 간디가 한 이 한마디 일 것이다.
"저는 오랫동안 신은 진리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전 진리가 신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겐 진리를 찾는게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합니다."

결국 진리를 향한 부단한 노력과 성찰이 없는 맹목적인 믿음이나 교리는 인간을 억압하는 도구로 작용할 뿐, 진정한 구도자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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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4. 21. 0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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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꺼리


“○○씨 둘째 아들 △△군 사법시험 합격”

차를 타고 시골마을을 지나다 보면 한두번씩 보게 되는 현수막의 문구이다.

이런 류의 현수막은 공통된 특징이 있다. 합격자의 이름 앞에 반드시 아버지의 이름이 먼저 붙는다는 것. 그리고 뒤에 따라오는 직책은 대체로 고위직 공무원이나 법조계, 군 장성급이라는 것이다. 또 한가지는 앞서도 말했지만 이러한 현수막은 이제 도시에서는 볼 수 없고 시골에서나 한 두 번씩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현수막을 보면서 늘 아쉬운게 있었다. 아래에 “열심히 하겠습니다”와 같이 어떻게 일하겠다는 각오나 공직에 임하는 자세에 대한 다짐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느 집안의 몇째 아들이 높은 자리에 앉았다는 사실일 뿐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 사회의 고위직 공무원이나 판검사 자리는 개인이나 집안의 이름을 빛내는 역할 외에 사회와 국가에 봉사하고 서비스 하는 의미는 그만큼 적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거꾸로 생각을 해본다. 지금껏 무수히 내걸렸던 현수막에 이러한 각오나 약속의 문구가 작게나마 실려 있었더라면 어쩌면 우리나라의 도덕성과 투명성은 훨씬 더 높아졌을 거라고.

한 가지 다행스런 것은 요즘엔 웬만한 시골마을에 가도 이러한 ‘촌스런’ 현수막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시골에서는 더 이상 인물 나기가 힘들어져서라고 볼 수도 있지만, 고위 공무원이나 법조계에 이름을 올리는 것만으로 집안의 자랑꺼리가 되는 시대는 이미 지났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대통령이 최근 자주 사용해서 논란이 되기도 한 ‘국격’이라는 말이 있다. 국어사전에도 없는 이 말을 굳이 해석하자면 ‘나라의 품격’ 또는 ‘한 국가의 이름값’ 정도가 될 것이다.

나라의 이름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고전적으로 먼저 떠오르는 것은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군사적으로 강성한 나라가 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식 자본주의가 세계금융위기를 불러오고 부도덕한 전쟁과 식량·에너지 위기의 근본 원인으로 지목되면서 무조건적인 성장과 군사력을 세상 사람들은 더 이상 존경하지도 부러워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이제 그러한 가치보다는 ‘행복’이라는 가치에 더 큰 비중을 두기 시작했다. 세계 11위의 경제 대국이라는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자살율이 1위이고, 그중에서도 특히 청소년과 노인의 자살율은 다른 OECD 국가의 몇배라는 통계는 우리 사회의 가치 기준을 되돌아볼 시기가 이미 지났다는 것을 말해준다. 국가행복지수 평가에서도 우리나라는 전체 178개 국 가운데 102위라는 부끄러운 기록을 세웠다.

이처럼 ‘불행’한 국가를 벗어나는 길로 사람들이 가장 먼저 선택한 것은 ‘복지시스템’이다. 사람들은 이제 ‘성장’과 ‘축적’ 보다는 ‘복지’와 ‘분배’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다가올 수많은 선거에서도 ‘복지’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될 것이 확실하다.

그러면 학교는 또 어떠한가.

지금까지 학교의 가치는 노골적으로 말해 ‘서울대에 몇 명을 보냈는가’가 평가 기준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러한 통계는 더 이상 우리 사회의 가치기준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명문대 졸업장이 예전처럼 인생 성공의 보증수표가 되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학 졸업생들의 취업난이 이미 심각한 수준이고, 명문대 석박사 학위자들도 취업할 곳이 없어 그냥 노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람들은 이제 명문대에 많이 보내는 학교 보다는 ‘아이들이 행복한 학교’를 꿈꾼다. 한 두명이 꾸는 꿈은 몽상에 지나지 않지만, 같은 꿈을 많은 사람들이 함께 꾸면 현실이 된다.

그렇게 같은 꿈을 꾼 사람들이 모여 대안학교를 만들고 있고, ‘아이들이 행복한 학교’를 만들기 위한 실험들을 전국에서 이미 하고 있다.

진주고등학교 동문들이 사회 각분야에서 좋은 성과를 내고 높은 직책에 올랐다는 뉴스를 보고 마냥 기분 좋아라 할 수 없는 이유들이 있다. 지위가 높은 만큼 책임도 뒤따르기 때문이다. 사회적 지위의 높고 낮음이 문제가 아니라 이제는 이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고 큰 가치기준이 되었다.

우리 사회의 복지와 남북간의 화해, 세계의 평화를 위해 헌신하고 봉사한 동문들에 관한 많은 뉴스가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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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4. 1.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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