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 둘째 아들 △△군 사법시험 합격”
차를 타고 시골마을을 지나다 보면 한두번씩 보게 되는 현수막의 문구이다.
이런 류의 현수막은 공통된 특징이 있다. 합격자의 이름 앞에 반드시 아버지의 이름이 먼저 붙는다는 것. 그리고 뒤에 따라오는 직책은 대체로 고위직 공무원이나 법조계, 군 장성급이라는 것이다. 또 한가지는 앞서도 말했지만 이러한 현수막은 이제 도시에서는 볼 수 없고 시골에서나 한 두 번씩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현수막을 보면서 늘 아쉬운게 있었다. 아래에 “열심히 하겠습니다”와 같이 어떻게 일하겠다는 각오나 공직에 임하는 자세에 대한 다짐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느 집안의 몇째 아들이 높은 자리에 앉았다는 사실일 뿐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 사회의 고위직 공무원이나 판검사 자리는 개인이나 집안의 이름을 빛내는 역할 외에 사회와 국가에 봉사하고 서비스 하는 의미는 그만큼 적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거꾸로 생각을 해본다. 지금껏 무수히 내걸렸던 현수막에 이러한 각오나 약속의 문구가 작게나마 실려 있었더라면 어쩌면 우리나라의 도덕성과 투명성은 훨씬 더 높아졌을 거라고.
한 가지 다행스런 것은 요즘엔 웬만한 시골마을에 가도 이러한 ‘촌스런’ 현수막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시골에서는 더 이상 인물 나기가 힘들어져서라고 볼 수도 있지만, 고위 공무원이나 법조계에 이름을 올리는 것만으로 집안의 자랑꺼리가 되는 시대는 이미 지났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대통령이 최근 자주 사용해서 논란이 되기도 한 ‘국격’이라는 말이 있다. 국어사전에도 없는 이 말을 굳이 해석하자면 ‘나라의 품격’ 또는 ‘한 국가의 이름값’ 정도가 될 것이다.
나라의 이름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고전적으로 먼저 떠오르는 것은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군사적으로 강성한 나라가 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식 자본주의가 세계금융위기를 불러오고 부도덕한 전쟁과 식량·에너지 위기의 근본 원인으로 지목되면서 무조건적인 성장과 군사력을 세상 사람들은 더 이상 존경하지도 부러워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이제 그러한 가치보다는 ‘행복’이라는 가치에 더 큰 비중을 두기 시작했다. 세계 11위의 경제 대국이라는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자살율이 1위이고, 그중에서도 특히 청소년과 노인의 자살율은 다른 OECD 국가의 몇배라는 통계는 우리 사회의 가치 기준을 되돌아볼 시기가 이미 지났다는 것을 말해준다. 국가행복지수 평가에서도 우리나라는 전체 178개 국 가운데 102위라는 부끄러운 기록을 세웠다.
이처럼 ‘불행’한 국가를 벗어나는 길로 사람들이 가장 먼저 선택한 것은 ‘복지시스템’이다. 사람들은 이제 ‘성장’과 ‘축적’ 보다는 ‘복지’와 ‘분배’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다가올 수많은 선거에서도 ‘복지’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될 것이 확실하다.
그러면 학교는 또 어떠한가.
지금까지 학교의 가치는 노골적으로 말해 ‘서울대에 몇 명을 보냈는가’가 평가 기준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러한 통계는 더 이상 우리 사회의 가치기준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명문대 졸업장이 예전처럼 인생 성공의 보증수표가 되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학 졸업생들의 취업난이 이미 심각한 수준이고, 명문대 석박사 학위자들도 취업할 곳이 없어 그냥 노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람들은 이제 명문대에 많이 보내는 학교 보다는 ‘아이들이 행복한 학교’를 꿈꾼다. 한 두명이 꾸는 꿈은 몽상에 지나지 않지만, 같은 꿈을 많은 사람들이 함께 꾸면 현실이 된다.
그렇게 같은 꿈을 꾼 사람들이 모여 대안학교를 만들고 있고, ‘아이들이 행복한 학교’를 만들기 위한 실험들을 전국에서 이미 하고 있다.
진주고등학교 동문들이 사회 각분야에서 좋은 성과를 내고 높은 직책에 올랐다는 뉴스를 보고 마냥 기분 좋아라 할 수 없는 이유들이 있다. 지위가 높은 만큼 책임도 뒤따르기 때문이다. 사회적 지위의 높고 낮음이 문제가 아니라 이제는 이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고 큰 가치기준이 되었다.
우리 사회의 복지와 남북간의 화해, 세계의 평화를 위해 헌신하고 봉사한 동문들에 관한 많은 뉴스가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